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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옥천암

봉은사 소식지 '판전' 8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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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팀 작성일11-09-05 19:57 조회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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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28일 저녁 6시. 벌써 땅거미가 깔려 어둑해지고 있었다. 부패한 종단을 개혁하고자 조계사 총무 원 청사 앞마당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승가대중과 청년불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날 새벽엔 총무원이 고용한 용역 깡패들이 한바탕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은 그런 폭력을 방관할 뿐이었다. 오히려 서의현 체제를 옹호하려는 정부의 공권력은 농성 중인 스님과 불자들에게 해산하라는 방송을 반복했다. 6시쯤 되자 무려 1천5백여 명의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이 들이닥쳤다. 아수라장이 된 청사 앞에서 정범 스님이 신나 를온몸에끼얹고외쳤다.“ 종단개혁짓밟는폭력경찰물러가라!” -글 서동석불교포커스논설위원, -사진 백운종.

1994년에 있었던 종단개혁은‘바른 종단’에 대한 사부대중의 염원으로 일궈낸 감동의 역사였다. 1980년 10월, 전두환이 이끄는 군부 세력은 한국 불교 사상 가장 참담한‘법난’을 일으켰고, 법난 직후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허수아비 집행부를 세워 종권을 유린하였다. 그렇게 들어선 종단 집행부는 정치 권력에 예속된 채 더욱 부패해졌고 80년대 중반, 거세게 몰아치는 사회민주화의 물결과는 달리 독재자의 편에 서서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였다. 국가 공권력은 그런 종단을 일방적으로 엄호했지만 마침내 대중의 단결된 힘으로 개혁의 깃발을 총무원에 걸 수 있었다. 그 현장에 있던 누구라 할 것 없이 정법의 눈물과 땀을 흘렸는데, 그 중에서도 기꺼이‘소신공양’마저 감수하려던 정범 스님의 모습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있다.


선대로부터 입은 은덕 후대에 전하고파


“그땐 정말 혈기왕성했지요.”어느새 18년이 흘렀다. 스님은‘사실은 지금도 불끈불끈 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종단의 종회의원이라는 소임과 이런저런 일에 매이다보니 그때보다 행동이 무거워졌다. 그 미안함을 스님은“교묘하게 비켜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그러는 사이 문수 스님이‘소신공양’으로 개발독재정부에 장군죽비를 내리고 대중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했으니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어찌 절절하지 않겠나. “저는 윗대의 어른 스님들께서 일궈놓으신 불사의 덕을 톡톡히 입고 살아 왔습니다. 지금 수덕사 방장스님에게 이끌려 출가한 뒤 동국대에 재학하면서 화계사 백상원에서 학업을 수행했고, 군법사로 장교생활을 하다 전역한 뒤에는 문중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이라는 덕도 입었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숭산 큰스님께서 진작 국제포교의 선각자로서 미국 곳곳에 부처님의 너른 마당을 닦아놓으셔서 그 곳에서의 생활 또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법장 스님께서 총무원장에 취임하시면서 유학을 접고 종단의 중앙 일을 맡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는 모두 어른 스님들의 은덕입니다. 모쪼록 내가 입은 은덕만큼 후대들도 더 좋은 여건에서 더 좋은 불사를 할 수 있도록 제역할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현재 맡고 있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우선 세검정 옥천암 주지이며 현재 총무원장의 전산정보종책특별보좌관, 중앙종회의원으로서 포교분과위원장, 군종특별교구 종책의장, 서울경찰청 경승 사무국장에다가 동국대 석림동문회 일도 맡고 있고, 또 한국불교국제네트워크(KBIN)의 대표에 서울시 문화재찾기 위원의 소임도 맡고 있다. 게다가 대한불교청년회(대불청) 지도법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스님이 열정을 쏟고 있는‘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 준비위원회’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 불교의 동량이 되어야 할 대불청에는 정작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청년회·대학생회 활동 사찰중심으로 변화해야 “1992∼1993년 무렵에 경기도 수원지역에서 청년법회를 주관한 인연으로 지도법사를 맡았습니다만, 아직 제 몫을 못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청년조직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청년조직을 변화하는 사회적 여건과 우리 불교계의 역량을 반영하는 연합체가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과거 사찰이 포교에 적극 나서지 못하던 무렵에는 사찰청년회가 아니라 지역의 불자청년을 묶는 지역조직이 필요했다.
대학생불자회도 사찰보다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들 조직의 활동에 힘입어 청년불자들이 자긍심을 갖고 활발하게 신행 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사찰이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지역사회에서의 제 역할을 고민하면서부터 과거와는 여건이 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신도들의 결집도 포교원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사찰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청년조직이든 학생 조직이든 사찰중심의 활동으로 변화했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아직 사찰이 청년과 대학생을 끌어안을 수 있는 충분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과거보다는 향상된 수준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사찰의 청년회, 대학생회가 회원(지회)이 되고 이들 지회의 대의원이 지역조직을 꾸리고 나아가 광역 지부와 전국 단위의 연합체 또는 협의체가 꾸려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어쨌든 스님의 판단이 조직에 반영될 날이 어서 와서 청년·학생조직이 침체에서 벗어나길 고대해 본다.

백제불교 원형 되살리는‘내포가야산 성역화’

스님이 현재 어떤 일보다 힘을 쏟는 일이 있다.
“어떤 일은 들이는 공력에 따라 술술 잘 풀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은 아무리 힘을 들여도 뭔가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더군요. 그런 걸 보면 다‘인연과 시절’이 있나 봅니다.”
아마 시절이 맞아 잘 풀리는 일이‘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 불사가 아닐까. 스님이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 준비위원회’는 다가오는 양력 8월 15일, 충남 서산군 보원사에서 준비위라는 꼬리표를 떼고‘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위원회’로 정식 발족한다. 내포가야산 성역화 불사는 2004년부터 그 지역 교구본사인 수덕사가 원력을 세워 추진하던 역사적인 사업인데 마침 올해 초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이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밝히면서 성역화 추진에 부쩍 힘이 붙었다. 지역의 본사와 서울의 조계사, 화계사, 호압사, 미타사, 옥천암, 춘천 정법사 등이 연대하여‘문화결사’를 벌임으로써‘역사복원 불사’에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종단 안팎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충남·예산·서산·홍성·태안·당진·아산 등을 아우르는 일대를 이른다. 아산만, 가로림만, 천수만으로 흐르는 뭍의 물길을 타고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뱃길이 닿아있다. 그런 입지조건으로 일찌감치 중국의 불교 문화가 이곳을 거쳐 백제로 전해졌다. 이 일대에서 절터가 확인된 것만 해도 1백 군데가 넘는다. 절터의 이름도 보원사지 등 한자로 된 절이 있는가 하면 아랫절터, 윗절터, 큰골 절터, 지럭절터, 바랭이절터 등 살가운 우리말 절터도 많다.

옛 보원사는 백제를 정복한 신라가 세운 절인데 기록에는 한때 1천 명의 스님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서울, 경주는 아직도 찬란하게‘부처님 땅’으로 남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지만 내포 일대의 불국토는 패배한 왕조의 운명처럼 잡초만 무성한‘절터’로 전해오고 있다. 패배한 왕조, 백제 땅이었던 전남 승주 일대에는 민중의 모습을 닮은 천불 천탑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내포 일대에는 그나마 못생긴 불상이나 무너져 내린 돌탑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어느 곳에는 웅장한 전각을 떠받쳤을 주춧돌이 남아 그곳이 부처님의 도량이었음을 알게 한다. 더욱이 가야산의 가야사는 조선왕조가 몰락하던 무렵,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대원군) 이하응이 지관의 꼬임에 넘어가 절을 불사르고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썼다. 그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하여 묘를 썼는데 지관의 말대로 흥선의 아들이 고종과 순종이었으니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훼불의 업보로 왕조가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왜구에게 나라를 내주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 으니 그 죄업은 어찌할거나. 흥선이 지은 죄업은 이 나라 민중에게 전가되었고 그 처절한 역사의 그늘이 오늘에도 드리우고 있으니 그를 거울삼아, 정치한다는 이들일수록 불교를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내포 성역화 불사는 단순히 옛절을 다시 건립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터만 남은 절을 복원하면서 유교와 불교의 화쟁을 본보기로 삼고 또한 백제불교의 원형을 되살려 패자의 역사에 담겨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도 우리의 유산임을 보이고자 하는 겁니다. 아울러 이번 성역화 불사처럼 서울과 지방의 사찰과 단체가 연대하고 또 이를 계기로 도시의 사찰과 농촌이 장터를 열어 상생하는 길을 찾는데 또 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지난 7월 10일, 봉은사에서 그 장터가 열렸다. 정범 스님은 다가오는 8월 15일, 본격화되는 내포 성역화 불사에 봉은사 사부대중의 보다 큰 관심과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고려 때 조성된 유명한 옥천암 보도각백불의 가피도 있을 터이니 분명 일이 술술 잘 풀리리라.


사진 1 설명 : ‘백제불교의 미소’가 서린 내포의 성역화 주역 정범 스님
옥천암 주지 정범 스님

사진 2 설명 : 정범 스님이 주지로 있는 옥천암 전경. 옥천암은 홍지문 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장의사라는 절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졌으며, 특히‘보도각 백물’이라 불리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이 유명하다.

사진 3 이상 설명 : 정범 스님은 최근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일대의 절을 복원하는‘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불사에 상임대표로서 열의를 쏟고 있다. 이를 통해 유교와 불교의 화쟁을 본보기로 삼고 또한 백제불교의 원형을 되살려 패자의 역사에 담겨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소개하고자 함이다. 오는 8월 15일에‘내포가야산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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